2012. 10. 27.

할머니와 아빠

할머니, 4월 28일 2012


우리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신다.
시골에 갈 때마다 점점 더 안 좋아지시는 귀 때문에 나는 말수가 적어진다.
할머니는 내가 밥은 먹었는지 걱정되셔서 계속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신다.
나는 할머니께 큰 절을 하고 나서는 할 말이 없다.











할머니와 아빠, 4월 28일 2012

그렇게 잘 안들리는 할머니는 아빠를 만나시면 꼭 보청기라도 단 것처럼 잘 알아들으신다.
사람은 귀로만 듣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으로, 영혼으로 교감한다.
할머니와 아들은 저렇게 만지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우리 아빠가 할머니랑 같이 있을 때
그제서야 우리 아빠가 할머니라는 엄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곤 한다.
우리 아빠는 할머니에게 언제나 '병진아~'.












할머니의 손, 4월 8일 2012













할머니의 발, 4월 8일 2012












할머니, 4월 28일 2012













할아버지, 4월 28일 2012

할머니의 방 창가에는 할아버지가 걸터앉아 계신다.
할아버지는 정정하시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할머니를 바라보고 계신다.
할머니는 혼잣말로 할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놓곤 하셨는데
인연의 끈으로 맺어진 정은 어찌하실 수 없으셨나 보다.












할머니와 아빠, 4월 28일 2012

할머니와 아빠는 헤어질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할머니가 거동이 괜찮으셨을 적에는 밖에 나오셔서 아빠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곤 하셨다그러면 아빠도 창문을 열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빠가 할머니께 우리 가니까 나오지 말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 같다.
할머니는 아빠가 가려고 하면 계속 '병진아~'를 연거푸 부르셨다.
오늘도 변함없는 잠시의 이별 과정.
 할머니가 아빠를 사랑하는 모습엔 하나의 잡티도 없다.












할머니와 아빠, 8월 4일 2012

"어머니! 저 왔습니다. 병진이."
할머니는 분명 대답을 하신 것 같은데,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할머니, 8월 4일 2012

할머니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신지 열흘이 넘었다.
평소에 뇌출혈하면 죽음이나 마비를 떠올려서 그런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기력이 약화되신 것일 뿐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할머니와 아빠, 8월 4일 2012

아빠가 계속 얘기하고, 주물러 드리니 할머니가 힘겹게 입을 여신다











할머니, 8월 4일 2012


"밥이나 먹고 자자."
, 할머니께 밥 세 끼는 어떤 의미였을까.
옛날에 농사지을 적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일꾼들에게 밥을 줄 때에는 가정을
꾸리는 밑바탕이 되었을테고, 자식들에게 밥을 줄 때는 조건없는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눈은 병원의 흰 벽을 넘어 너른 보리밭을 응시하는 듯하다.
"보리 베러가자."
그 때가 생각나시는 가보다. 8남매가 모여살던 그 때. 일꾼들과 함께 보리 베러가던 그 때.












할머니와 아빠, 8월 4일 2012

아빠의 표정은 할머니를 볼 때 가장 편안하다.
주먹을 힘껏 쥐고 있다가 갑자기 펼 때 느껴지는 편안함랄까?
어떤 일을 하든밥벌이하는 가장의 일상은 고되다.
편하게 마음먹는다 해도 나도 모르게 주먹이 힘껏 쥐어지고 긴장한다.
그런데 집에 와서 엄마를 보면 주먹은 어느새 스르르 풀려 엄마의 손을 잡고 있다.
표정도 영락없는 애기가 되어버린다엄마의 '애기'.












할머니와 아빠, 8월 4일 2012


 "자꾸 눈물이 난다."

"?"
"작은 누이큰 누이가 그리워다 그리워."












할머니와 아빠, 8월 4일 2012
 갈 시간이 되었다.
아빠는 할머니가 잘 못 들으실까봐 귀 옆에 대고 얘기하신다.
"어머니, 가볼게요. 금방 다시 올게."











부자(父子), 9302012

아빠와 할아버지의 만남.
자꾸만 많아지는 아빠의 하얀 머리카락이 할아버지의 묘에 난 풀과 비슷하게 보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슬픔 속에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9월 30일 2012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묻힐 그 곳은 할아버지의 옆자리.












할머니의 방, 9월 30일 2012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계신다.












할머니, 10월 26일 2012

"할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떠 아빠를 바라보셨다."
엄마가 말씀해주신 임종의 순간이었다.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을 때, 무언가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감정은 만질 수 없었고, 점점 멀어져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 10월 26일 2012

큰 아버지는 형제봉에서 섬진강 쪽으로 날아오는 패러글라이더 대형을 보고,
하늘에 손톱이 한가득 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손톱과 같이 덧없이 자라나는 근심과 욕망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가셨을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 10월 26일 2012

"다시 땅으로 돌아가셨구나."
아빠가 말씀하셨다.
 
아빠는 장례식이 끝난 후, 할머니의 영정을 할머니 방 양지바른 곳에 놓으셨다.
그리곤 이제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그 방의 보일러 온도를 높이셨다.
하관할 때까지도 덤덤하던 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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